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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 수치, 그리고 고개숙인 우리
2013년 설문조사 결과, 콜센터 직원 300명 중 94%가 고객의 폭언 때문에 힘들어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갑을관계는 종종 ‘모멸’과 ‘모멸 감’이라는 감정을 생성해낸다. 작년의 ‘땅콩회항’과 ‘압구정 경비원 분신’ 사건들에도 그 감정들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무엇이 이 사회 모두를 모멸감으로 이끄는지를 마 주해야할 때다.
2015년 04월 01일 (수) 10:32:00 윤선미 기자 이단번 기자 kino2305@hs.ac.kr, matstar@hs.ac.kr
   
 
   
 

 모멸감의 의미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이다. 국어사전 을 찾아보면 모욕은 ‘타인을 업신여겨 욕되게 하 는 것’으로 정의돼있다. 모욕감은 ‘모욕을 당하는 느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 하될 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욕감 의 경우는 흔히 수치심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일 례로 지난 10일, 임권택·박찬욱 영화감독은 부 산국제영화제 외압 문제에 대해 “표현의 자유 억 압과 검열은 수치이자 모욕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모욕과 수 치를 따로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수치심은 본 인의 잘못이나 결함에 대한 타인의 지적에 반응 하는 부끄러운 감정이다. 이에 반해 모욕감은 상 대방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고 느끼 는 감정이다. 수치심이 자신의 반성으로 귀결된 다면, 모욕감은 상대에 대한 분노나 원한 같은 공격적 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수치심과 모욕감의 경계가 애매해지 는 경우도 존재한다. 상대방이 느낄 수치심을 노리고 모욕을 가하는 경우가 그렇다. 인터넷이 나 SNS 등을 이용한 명예형, 흔히 ‘신상털기’나 ‘000(장소) 무개념 人’ 등이 당사자들의 수치심 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모욕에 해당한다.


 간접적 인 모욕은 은근히 상대를 무시하는 것으로 나 타난다. 간접적인 모욕의 경우, 당하는 입장에서 느끼 는 감정은 모욕감보다는 모멸감에 가깝다. 비록 일상생활에서 두 단어가 동의어처럼 사용되지 만, 둘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모욕은 사전적 의 미상 공격적인 언행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모멸 은 ‘모욕’과 ‘경멸’의 뜻이 섞여 있는 단어다. 그 중 경멸은 ‘깔보아 업신여긴다’는 뜻으로 적대적 인 의도가 불분명한 경우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모멸감을 느낄 경우, 상대방의 의 도가 담겨있지 않을 수 있고 또 어떤 상황 자체 가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 속 ‘모멸감’의 실체 언어에 반영된 한국인의 정서지형 모든 언어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로서, 저마다 고유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구성원들이 오랫동 안 공유해온 경험, 자주 겪는 상황과 거기에 결 부되는 정서, 사물과 현상에 대한 독특한 해석 이나 가치관 등이 그것이다.


 한국어의 경우 의태어와 의성어가 두드러진 다. 어떤 모습이나 소리를 묘사하는 말들이 풍 부하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생동감을 더하는 말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의성어나 의태어 못 지않게 풍부한 것이 가정 용어다. 소리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만큼이나 사람의 마음도 정 교하게 포착하여 언어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런데 그 어휘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을 발견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단어가 긍정적인 것들에 비해 많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공과 사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비공식적인 관계에서도 언제나 위계 서열을 엄 격하게 따지는 문화를 갖고 있다. 때문에 자신 의 심경을 정직하게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 는 사회 권력관계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하 는 방식이 언어로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는 원동 력이 됐다.


 눈치보다, 굽실거리다, 꼬리를 내리다 등이 그 예이다.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평가 하는 용어를 보면, 상대방이 마음에 들게 행동 하는 경우 기특하다, 고분고분하다, 깍듯하다 등 이 있다. 반대로 눈에 거슬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 건방지다, 기어오르다, 맞먹다 등으로 그들을 평가하거나 상대의 태도를 묘사한다.


 언어는 생각과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현 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창출한다. 인간관계에 스며들어 있는 권력구조나 서열의식,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감정의 얼개가 언어를 통해 재 생산된다. 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말들을 해부함 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사회의 자화상을 그려볼 수 있다.


 이러한 말들을 보면 조직문화, 경제 실 서, 국가기구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박탈감과 억울함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들이 많은 것이다. 귀천에 대한 강박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전에 형성된 사회적 토 양을 살펴보려면 조선시대 때의 ‘귀’라는 관념에 대해 알아야한다.


 ‘귀’는 고귀하다는 뜻으로 어 떤 사람은 학문을 닦음으로써, 어떤 사람은 예 술이나 종교를 통해,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많은 것을 베풂으로써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사회에 보편적으로 개방되어야 할 ‘귀’가 벼슬이라는 것으로 축소되고 획일화되었 다. 즉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서 귀한 신분에 있 는 사람들조차 높은 벼슬을 해서 ‘귀’를 누려야 비로소 ‘천’함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


  한국적인 ‘귀’ 추구의 특수성, 혹은 강박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조선시대와 달리 ‘귀’가 관직에 의해서 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관료기구 이외에도 수많 은 조직이 생겨났고, 거기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귀’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시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재력이 곧 ‘귀’와 동일시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높은 연봉을 받 느냐, 소비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구매력을 갖느 냐가 행복의 기준으로 절대화 되어간 것이다. 교 육열이라는 것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언적인 가치를 향한 경쟁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현 대 한국사회는 여전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강 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다만 그 틀이 전근대적인 신분 질서가 아닐 뿐이다. 그 대신 학력, 빈부, 외 모, 지위 등이 확고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 런 차이들을 중심으로 현대인들은 귀함과 천함 을 구분하고 자기와 타인을 위아래로 자리매김 하며 모멸의 구조를 형성한다.


  공동체의 붕괴, 집단주의의 지속 모멸감은 타인을 모욕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 게 내뱉는 풍토에서 만연한다. 그런데 모멸감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타인들의 시선 과 평가에 대한 과민함이다.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 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의미의 개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차원으 로 나뉘는데,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 이면서 참견하고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것과 자기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너무 예민한 것이다. 개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삶의 형태와 의식 사이의 부정합이다.


 한국의 나 홀로 가구 증가 속도는 세계 최고이고, 가족 및 친척과의 접촉 빈도는 세계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 은 경제협력 개발기구 OECD 34개국 중 공동체 지수(공동체 생활로 위안을 얻고 정체성에 도움 을 받는 지수)가 33위다.


 개인주의가 깊이 뿌리 내린 서구 선진국들보다도 공동체의식이 상대적 으로 허약하다. 우리의 삶은 급속하게 개별화 되 는데,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개인주의는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한국의 근대화는 선진 산업사회를 재빨리 따 라잡는 것을 목표로 긴박하게 추진되었다.


 그러 다 보니 합리적 개인화를 수반하지 못한 채 집 단 에너지를 동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의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지만, 결국 개인의 독립도 사회적 유대도 모두 엉성한 채 외형적인 경제 규모만 커졌다. 고도 성장기에는 상승 이동 의 즐거움으로 그러한 부실함이 상쇄될 수 있었 다.


  그러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자, 사회의 약 한 고리들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증폭되는 갈등과 대립, 학교 현장에서의 왕따와 폭력, 가족의 해체, 우울증과 자살의 급증 등이 그것이다.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렇다고 개인 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하는 삶은 모멸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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