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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30년, 베트남의 모든 것을 함구하라
2015년 05월 20일 (수) 14:51:34 김지혜 기자, 이단번 기자 jihye5265@hs.ac.kr,matstar@hs.ac.kr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이 해외 파병을 나갔던 사건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후 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개발을 위해 자국 청년들을 희생한 용병 국가라는 비판을 듣는 와중에도 베트남 전쟁을 통해 얻은 한국 사회의 피해가 지금까지 강조돼 왔다.


  하지만 30년 전 인도차이나 반도의 한복판에서 한국군은 엄연히 가해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벌인 잔혹 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반성의 시도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대체 무엇이 일제강점기의 수난을 아는 한국인들을 학살자로 만들었으며, 왜 우리는 줄곧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 위치에 서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군 파병의 배경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통칭 베트남 전쟁은 한국군 5만 명을 파병했던 거대한 격돌의 장이 었다. 한국은 이승만 정권부터 한국군 파월의 가능성을 간헐적으로 제시했었다. 하지만 베트 남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 가 파병을 거절해 한국군 파병은 무산됐다.


 이승만의 실각 이후 등장한 군사독재 정부는 한국군 파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군사정부의 두 가지 당면과제는 한미동맹 체제를 강화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과 미국의 원조를 최 대로 얻어내 자립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었다. 하지만 미국이 주한미군의 일부를 베트남 으로 이동시킬 움직임을 보이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때 군사독재 정 부가 미국의 케네디 정부에게 제안한 것이 한국 군의 파월이었다. 주한미군을 대신해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을 일부분 수행하겠다는 거래였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전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케네디 정부는 한 국군의 파병이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가능성을 염려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케네디 대통령 사망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이 박정희 전대통 령을 미국으로 부르면서부터였다. 존슨 대통령 은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 했다. 한국군의 파병이 결정되자 군사독재 정 부는 1965년 3월 미국 국방장관에게 “한국군 을 베트남에 파병할 경우에는 그에 대한 보충 으로 미군을 증파하고 한국군의 무기 현대화 를 촉진시켜야 한다”라고 요구해 미군으로부터 양질의 군수물자를 제공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토대로 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손쉽게 이 룰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의 참전의 대가 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아 산 업 인프라 구축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과 남북의 긴장상태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 군사정부의 진 정한 수립이 시작됐다. 북한 특수부대원의 ‘청 와대 습격’ 실패 이후, 사회 각 부문이 군사체제 와 군사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었기 때문 이다. 1월 22일부터 자정에 시작되던 통행금지 가 10시로 앞당겨졌다. 공비 소탕 결과는 북한 특수부대원들 31명 중 29명이 죽고, 1명은 투 항해 생존, 1명은 북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의 선제공격은 지속됐다. 미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한반도 동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납치당하는 일명 ‘푸에르브호 사건’과 울진·삼 척지구에 무장간첩을 침투하기도 했다. 1967년부터 68년까지 1년 동안, 남북한 간 의 군 교전 횟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모두 북한의 선제공격은 아니었다. 최소 3분의 1은 남한의 도발과 보복성 선제공 격이었다.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군사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명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 다. 즉 박정희 전대통령은 남북 간의 긴장상태 라는 ‘위기’를 통해, 주한미군 주둔을 유지시키 려고 한 것이다. 베트남 파병으로 한미관계가 갑을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로 발전된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베 트남 전선과 한반도의 전선은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전에서 공산측이 승리하게 되 면 그 여파가 반드시 한반도에 미친다는 것이 다.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은 남한을 방어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는 베트남 파 병군인들의 죽음을 대가로 경부고속도로를 건 설했다. 또한 막대한 군사비를 지원받아 현역복 무 기간 연장과 향토예비군 창설, 교련 실시 등 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식 시스템을 사람들 일 상에 더욱 뿌리내리게 했다. 국민들을 전쟁으 로 내몰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을 다진 것이다.


  베트남 민간인에게 총을 겨눈 한국군

  베트남 전쟁은 약 9000명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 극을 낳았다. 한국군은 여기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 로 볼 수 있다.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 학살 발생의 가장 큰 요소는 ‘게릴라’ 의 존재였다. 전쟁 당시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흔히 ‘베 트콩’이라 알려진 게릴라 조직이 남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양상이 게릴라전으로 흘러가자 한국군은 자 신이 마주한 사람이 민간인인지 민간인을 가장한 적군인지 구 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하지만 게릴라의 존재만으로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 비극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략노선, 의식교육, 군부대의 열악 한 상황 등이 종합적으로 얽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지휘부는 비무장 민간인들도 공격의 대 상으로 설정하는 전략노선을 취했다. 1966년 5월 25일에 발간 된 주월 한국군사령부의 전훈집은 “부락은 전부 적 활동의 근 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 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 락에 놓여있으며 베트콩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다” 라고 강조했다. 군사령부의 베트남 민간인 인식이 ‘언제든 한국 군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잠정적 적군’으로 설정돼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들을 사살하는데 머뭇거리는 전우들을 그들의 ‘민간인-베트콩 논리’ 속으로 빠지도록 부추겼다. 퐁니, 퐁넛, 빈호아, 하미 마을 등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 인 학살의 과정은 그곳 주민들이 ‘증오비’를 세울 만큼 잔혹했다.


 유탄과 기관총을 사용하는가 하면, 여성의 경우는 가슴을 도려내는 등의 살인행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한국군 병사들이 민간인 학살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주입된 의식과 군대의 위계질서가 그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한 참전자 는 “정찰수색에 나갔다가 지하 동굴 안에서 3명의 베트남인들 을 발견했다. 그들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와 바로 나무에 묶었다.


 신문이고 통역이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참들은 신 병들에게 착검을 하고 찌르라고 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자 고 참은 신병 머리에 명령불복종이라 총구를 갖다 댔다. 결국 신병 들은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인들을 죽였다.”라고 증언했다. 통역사의 부재도 병사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당시 전 선에서 활동하는 모든 한국군 제대 단위에 통역병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통역병이 갖춰지지 않은 중·소·분대의 경우는 베트 남 민간인과 조우했을 시 그들을 적군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 이 없었다. 일례로 한 참전 병사의 증언에 의하면, 통역병이 갖 춰지지 않은 10명 안팎의 소규모 부대가 작전 도중 민간인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부대원들은 마주한 민간인들의 정체를 파 악하려는 시도에 시간을 쓰기 보다는 그들을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


  부대의 위치가 적에게 노출돼 기습이나 함정에 당할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과잉된 자기방어였다. 학살의 생존자들과 참전 군인들은 3가지 요인이 전장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유도한 정황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모든 요소들 이 겹치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죽여야 하는 배경이 성립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3가지 요인이 학살의 정당한 이유 가 될 수는 없다.

  이중적 역사인식의 실체

 주월미군사령관 워스트 몰랜드는 주월한국사령관인 채명신 중장에게 ‘해병대 제2여단의 잔혹행위 의혹 사건’에 관한 문서 와 사진을 보냈었다. 한국이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인한게 맞느 냐는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채명신은 이에 대한 사실을 음모로 만들었다.


  ‘베트콩은 베트남 사람들 과 한국군 사이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지역 베트공들이 책임을 한국군에 돌리고 이를 주월한국군에 반대하는 악선전으로 이용하기 위해 퐁니와 퐁넛 마을에서 잔 혹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는 편지를 웨스트 몰른드에 게 보낸 것이다.


 하지만 1970년 1월 10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재월 인문과 학연구소 전 소장인 테리 램보는 “한국군이 수백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살해했고 주월 미군사령부의 고위 장성이 한국군 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 식을 접한 한국 정부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주한 미(美)대사 포 터는 당일 로저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청와대에서 박 정희 대통령,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최규하 외무장관 등이 모 여 긴급히 우리와 토의했다. 청와대는 한국 언론매체들이 이 이야기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보고했다. 은폐와 조작 속에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인 한국은 ‘타 국가를 침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나라’라는 교육을 퍼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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