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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위안부, 이제는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
한국군 위안부를 알고 있는가? ‘위안부’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나, ‘한국군위안부’는 낯설게 느껴질 것 이다. 그들의 존재는 오랜 세월 은폐되어 왔다. 우리민족의 치부와 젠더 권력관계의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 이다. 본지는 오랫동안 수면 아래 있었던 한국군 위안부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보았다.
2016년 09월 27일 (화) 01:28:52 이성민 기자, 조수연 기자 ansdjwhgdk12@hs.ac.kr, syeon_1348@hs.ac.kr
한국군 위안부? 그런게 있었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 한은 남한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한다. 하 지만 같은 해, 한국군과 연합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이번엔 남한이 북한 대부분의 지 역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 의 참전으로 북한은 서울을 재점령하게 되 고, 이에 따라 그 유명한 1.4후퇴가 이뤄진 다. 1951년 3월 남한이 서울을 재탈환하게 됨으로서 전쟁은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됐다. 이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 체결되기까지 계속됐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이 기간 동안 전선에서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됐고, 대 한민국 육군 본부는 한국군 위안부, 즉 ‘특 수위안대’를 설치한다.


휴전협정 후의 3년이 지난 1956년, 육군본 부는 “후방전사”라는 책을 낸다. 책은 이후의 군대에 대한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는 데 에 기여하고자 함을 출간 목적으로 밝힌다. 바로 이 책에 특수위안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특수위안대가 한국전쟁 당시 군인에 대한 후방 지원을 목적으로 한 군대 시설중 하나이며, 국가에 의해 창설됐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장교들은 현지처를 뒀고, 간혹 병사들이 강제로 데리고 온 여성들로 부터 ‘성 상납’을 받았다. 반면, 일반 병사들 은 점령지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성욕 을 해소했다. 실제로 한국군이 38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인민군과 ‘빨갱이’ 가 족,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예외 없는 성폭력 이 가해졌다. 밤마다 한국군이 젊은 여성들 을 겁탈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넘나들었을 정도다. 그래서 몇 몇 여성들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인척하기도 했고, 거지처럼 꾸미고 다니기 도 했다. 육군본부는 전선이 고착되며 벌어 지는 이 같은 상황을 정리하고, 전투로 노 고가 많은 군인들을 위로 및 포상하기 위해 특수위안대를 조직하게 된다.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 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 하면 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양양은 물론 전쟁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해 후방 래왕이 없으니 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 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해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됐다.” -육군본부 『후방전사』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가능한 ‘생리작용’이 라는 생각, 따라서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그 분출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고가 ‘특 수위안대’를 낳았다. 이러한 사고는 ‘남성은 본디 성욕의 동물’이라는, 그래서 ‘여성이 성 적인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오늘 날의 지배적인 성 관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수위안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후방전 사”의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전 쟁 당시 국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사람이었 던 채명신 장군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 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이것을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국군의 특 수위안대에는 대략 180~240명 정도의 위안 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1953 년에 신설된 4개 위안대까지 고려한다면 족히 300명은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육군본부의 “후방전사”에는 1952년 특수 위안대 실적통계표가 수록돼 있다. 여기서 실적이란 피위안자-위안부를 이용한 자- 의 수를 뜻 한다. ‘실적.’ 당시 위안부는 사람 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사용되고 버려지 는 물건이었다. 이름 하여 ‘보급품.’


“연대 1과에서 중대별 제 5종 보급품 수 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 돼 왔다.“ -김희오 『인간의 향기: 자유민주/대공투쟁과 함꼐한 인생역정』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에 따르면 그 해 서울과 강릉에 있는 4개의 특수위안대 는 20만명이 넘는 군인들을 상대했다. 위안 부 한 명이 하루에 평균 6명 이상과 성 행위 를 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여기에 전선 부대에 출장을 온 군인들까지 포함한다면 하 루 평균 피위안자의 수는 더욱 많아진다.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 위안대가 부대 숙 영지 부근에 도착했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 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 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 침실에 수용됐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차규헌 예비역 육군 대장 회고록 『전투』


전선에서 위안부대의 출입은 하나의 ‘포 상‘이었다. ‘티켓제.’ 즉 위안부와 자려면 티 켓이 있어야 했는데, 이것은 전쟁터에서 용 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배부됐고, 그 공훈의 정도에 따라서도 배부양이 달라 졌다.


“그곳은 천막에 들어가서 여자에게 표를 주고 10여 분간 즐기고 나오는 그런 곳이었 다. 사병들은 안을 기웃 거리며 안에다 대고 ‘빨리 나와! 빨리 나와!’하며 소리를 질러대 고 있었다.” -한인수 『격량의 세울과 인샬라』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는 당연한 조치를 넘어 전쟁의 ‘필수적’인 요소로까지 인식됐 다. 1952년 당시, 200~300명 정도의 위안부 로는 20만 군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힘 들어졌다. 게다가 1951년 7월 이래 최전선 에서 특별한 전투가 없는 대치상황이 계속 되자 군인들의 군기가 문란해지기 시작했 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언론에서 위안부대 확충에 대한 요구가 나온다.


“전국 각지에 일선장병 휴가 귀향 시에 피 로한 심신을 풀어주며 승전을 위해 생명까 지도 바치는 참된 애국자들의 사기를 도웁 기 위한 따뜻한 위안소를 조속히 설치할 것” -동아일보, 1952년 12월 30일자


결국 새로운 위안부대가 신설된다. 그 시 기는 한국전쟁이 종료된 이후인 1953년 11 월, 남한과 북한 모두 아직 60만여 명의 대 군을 휴전선 부근에 유지했던 때였다. 당시 군인들은 제대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 이 컸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은 위안부 제 도를 유지하기로 한다. 특수위안대는 1954 년 3월이 되어서야 해체 되게 된다. 하지만 군인들의 ‘성 착취’에 대한 욕망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결국 군부대 근처에 성매매 업소 들이 들어섰다. 이제 그들이 위안부의 역할 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위안대는 해체됐지 만, 끝내는 없어지지 않은 셈이다.


그들은 어떻게 동원 되었나

   
 
   
 

한국군 위안대인 ‘특수위안대’는 육군본 부에서 정식으로 설치하였다. 동원 방식은 대부분 납치 등의 강제 동원이었다. 즉, 그 곳에서 한국군 위안부들은 반인권적인 노 예가 된 것이다. 당시 한국군 위안부의 현실 은 실로 참혹했다.


한국군 위안부들의 대부분은 꾀죄죄한 모 습을 한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들 은 아침에 일어나면 주로 빨래와 청소 등의 온 갖 부역을 도맡아 했다. 궂은일을 모두 끝냈다 고 쉴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을 기 다리고 있는 건 낮에 일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한 부대원들이었다. 밤이 되면 그들은 그렇게 성노예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 위안부들은 주 1회 군의(軍醫)부터 성병검진 을 받았으며 장교를 상대하는 여성과 일반 병 사를 상대하는 여성으로 나뉘기도 했다.


그러한 한국군 위안부 중 몇몇은 북 혹은 남으로 이동을 하다가 억울하게 끌려와 ‘빨 갱이’ 혹은 ‘빨갱이 가족’ 취급을 받았다. 실제 로 사회주의자였거나 인민군의 편에 선 사람 들이 있기는 했으나 전쟁고아인 사람들도 많 았다. 간혹, 성노예 생활을 면하는 이들이 있 었다. 장교와 같이 계급이 높은 이들한테 ‘성 상납’이 되었다가 운이 좋게 결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민군부역자와 군 위안부로부터 작별을 고할 수 있다. 이를 운 이 좋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지 만 간첩혐의로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 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종종 가족이나 지 인들의 보증으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으나 많 은 이들이 그렇게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젠더폭력과 민족주의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 이다. 한국전쟁 당시 주요 지휘관 중 한 사 람이었던 김희오는 자신의 중대에 ‘제 5종 보급품’이 배정됐던 얘기를 하며 “과거 일본 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양양을 위한 발상으로 일부로 거 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온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해방 이후 창설 된 대한민국 육군 간부의 상당수는 과거 일 본군과 관동군 장교들로 구성됐다.


독립군 을 토벌하고, 일본 제국의 팽창전쟁에 가담 했던 그들이 해방 후에도 한국군에 남아 고 위 계급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군정 이 남한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배 경험이 있는 자들을 관료로 등용했기 때문 이었다. 한국군은 형식적으로는 미국식으 로 개편됐지만, 군부의 일제부역자들은 득 세하게 됨으로서 사실상 일제 군대 문화와 제도들을 답습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성폭력의 주범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65 년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군은 위안부대 를 조직해 베트남에 데려가려 했다. 그러 나 이는 미국 측에 의해 거절된다. 한국군 이 받은 월급으로 충분히 여자를 ‘살 수’ 있 다는 것. 그래서 한국군은 베트남에 현지 여성들을 동원해 매춘소를 만들었다(이들 은 대략 5천~3만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점령지의 여성들을 강 간했다. 베트남에는 전쟁희생자 추모비와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이 자행했던 민간 인 학살과 성폭력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설 움과 분노가 담겨있다. 여태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만행들에 대해 아무 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숨기기에 급급하다. 우리가 일본에게 그토록 요구했 던 ‘공식적인 사죄와 보상’을 우리 또한 하 지 않은 것이다.


한국군위안부와 베트남에서 벌어진 성 폭력의 원인을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일재잔재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일제 군 대문화와 제도를 한국군이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군이, 더 나아가서 는 ‘국가’라는 남성중심의 공동체가 그것 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내지 ‘지지’가 있었 음을 뜻한다. 이는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인 원인이 남성의 성욕을 절대시하고 여성 을 도구화하는 비대칭적인 남녀권력관계 라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러한 권력관계가 공적으로 드러 날 수 있게 한 조건에 불과하다.


김귀정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 문제의 유 일한 연구자다. 2002년, 그녀가 일본에서 열린 제 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 포지움’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최초 로 공개하자, 지식인들은 ‘당시의 연구 성 과는 인정하지만 굳이 민족의 수치를 이렇 게 드러내야 겠느냐’며 그녀를 질타했다. 이렇듯, 민족주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 과 억압을 은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 부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존속시킨다.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기 힘 들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집단’의 단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 안에 존 재하는 내밀한 폭력의 구조를 놓치게 한 다. 억압의 질서를 드러내고, 소수자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폭로하기 위해선 시선을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겨야 한다.


한국군들은 한국 여성과 베트남 여성들 에게 끔찍한 가해자였다. ‘나라를 지킨 영 웅’이라는 모습 이면에는 그들이 벌인 끔 찍한 행태들이 은폐돼있다.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더럽고 변태 같은 일본 놈들’과 한국군은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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