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보기PDF 560호 update 2018.10.23 화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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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억과 도시 재생
2018년 10월 23일 (화) 22:35:39 정윤수 @hs.ac.kr

  크고 작은 도시들에 가보면, 조금은 쇠락한 거리에 벽화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대로 보기 좋지만, 낡은 거리에 ‘이쁘장한’ 그림들, 거의 스마트폰 아이콘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게 좋은 일일까, 생각하게 된다. 부산 감천마을이나 통영 동피랑 마을처럼 이른바 ‘지역 경제 활성화’에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관광객들 구미에 맞게 그리다 보니 대체로 어색하고 더러는 천박하다. 인천에 가면 ‘동화마을’이 있는데, 낙후하고 가난한 이 동네 주민들은 늘 치안이나 복지나 교육 시설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자치구에서는 이곳을 요란한 벽화로 그려서 ‘관광지’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엔 마을 주민들도 좋아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주민들의 삶의 여건 개선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동물원의 원숭이 신세로 전락했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다.

 이런 마을 벽화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 곳곳에서 이른바 ‘도시 재생’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 산업화 시대의 오래된 공장이나 낡은 창고를 허물지 않고 미술관이나 예술가 스튜디오 등으로 변모시키는 일이다. 벽화 그리기 보다는 좀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데, 그러나 이 현상도 주의해서 봐야 한다.

 영국의 런던에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있다. 원래 화력발전소였다. 1981년 문을 닫은 채 방치되었다가 2000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된다. 지금도 건물 중심에 거대한 굴뚝이 자리하고 있다. 석유 파동의 여파로 문을 닫은 화력 발전소가 현대 미술을 상징하는 건물로 거듭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력발전소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치러낸 산업 혁명과 격렬한 도시화 과정을 제대로 기억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더 생생한 사례가 있다. 독일의 북서쪽에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는 전통적인 산업 도시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루르 강을 중심으로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 에센 같은 도시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철강과 석탄 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19세기 이래 독일 산업 혁명의 근거지였으며 2차 대전 이후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의 현장이고 196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이 대거 광부로 일하러 간 곳이다. 특히 에센에는 졸퍼라인이라는 탄광 지대가 있는데, 1986년 폐광되기까지 세계 최대의 석탄 생산 지대였다. 그러다가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면서 쇠락한다. 그런데 2010년에는 이 도시가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된다. 폐광 도시가 어떻게 유럽문화 수도로 지정되었을까.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이 도시를 주 정부와 기업과 각계 전문들가들이 십수 년에 걸쳐 박물관, 극장, 디자인 센터, 공원 등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이 탄전 지대에서 열리는 예술제 루르트리엔날레(ruhrtriennale)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격전장이다. 기존의 극장 형식이나 규모에서는 펼쳐낼 수 없는 파격적인 형식과 다중융합의 예술이 이곳에서는 자유자재로 펼쳐진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대적인 변모의 최우선 과제가 ‘지역 주민 이탈 방지’라는 점이다. 대체로 상당한 수준의 도시 개발 또는 재생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재개발이 이뤄지고 외부 자본과 인력이 유입되기 마련인데, 루르 일대의 도시 재생의 최고 목표는 지역 주민이 떠나지 않고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어 위엄있게 다시 살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여러 도시들의 도시 재생 사업과 달리 ‘관광객 유치’ 같은 목표는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우선 지역 주민의 주거를 안정화하고 그들이 기존의 중화학 산업 환경과는 다른 조건, 즉 문화예술과 정보화에 적응하도록 상당한 교육을 시행하고, 심지어 일정 규모 이상의 박물관이나 전문 예술학교를 적극 신설하거나 유치함으로써, 도시 전체가 21세기에 맞게 활력을 되찾는 것, 그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그것은 성공하였다. 그 정점인 루르트리엔날레는, 단순한 지역 축제가 아니라 21세기 최고의 실험 예술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연스럽게 관광객이 세계 곳곳에서 찾는 도시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체 과정에서, 그 도시의 삶의 기억, 즉 산업 혁명 이후 2백여 년에 걸친 노동의 역사와 노동 운동의 역사를 가장 중요한 콘텐츠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그 동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쁘장한’ 벽화를 함부로 그려넣거나 폐광 지역에 카지노를 집어넣어 마을 문화 자체가 파괴되곤 했다. 탄광 지역의 역사, 힘겨운 노동의 기억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다. 관광객 유치에만 매몰되어 소중한 삶의 기억은 다 왜곡되거나 사라졌다. 그러는 바람에, 특색도 없고 가치도 없는, 도시 재생이라고 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도시를 역사와 정체성을 파괴하는, 그런 일이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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